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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수 검사입니다' 피해자 2주기.. 유족 또 울린 '그놈 목소리'
2022-01-24 1071
조수영기자
  jaws0@naver.com

“엄마 나 후빈. 폰 떨어뜨려 액정 나갔어.”


지난 6일, 전북 순창에 사는 정은재(56) 씨가 받은 문자메시지 내용입니다. 문자 속 아들은 엄마한테 부탁할 게 있다며 답장을 재촉합니다. 


자녀들이 급할 때 쓰는 ‘엄마찬스’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입니다. 마치 위급한 상황에 빠진 것처럼 속여 모성을 자극한 뒤, 끝내 고액의 상품권 결제나 송금을 유도하는 전화사기 수법입니다.


 

그런데 엄마 은재 씨는 문자를 읽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기분이었습니다. 화도 많이 났습니다. 아들을 사칭한 전화사기 문자 속 ‘후빈’, 2년 전 가슴에 묻은 첫째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28살 취업준비생이던 아들의 꿈과 목숨을 송두리째 앗아간 것도 다름 아닌 전화사기였습니다.



■ 이어폰 너머 '그놈 목소리'.. "김민수 검사입니다"


후빈 씨가 빨간 점퍼 차림에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선 그날. 아파트 승강기 내부를 비춘 CCTV엔 휴대전화 이어폰을 귀에 꽂고 누군가와 대화를 이어가는 장면이 포착됐습니다. 그게 비극의 시작이 될 줄은 본인도 몰랐고 주변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2020년 1월 20일 오전 10시. 이어폰 너머에는 늑대의 탈을 쓴 ‘그놈들'이 있었습니다. 각자를 ‘김민수 검사’와 ‘이도현 수사관’이라고 소개한 이들은 역할을 분담해 후빈 씨를 착란에 빠뜨렸습니다.


이들이 노린 건 후빈 씨가 인턴 월급을 모아둔 통장 잔고 420만 원. ①“대포통장 범죄에 연루됐다”는 날벼락 통보, ② “전화를 끊으면 구속된다”는 엄포, ③“당장 현금을 찾아 주민센터 물품 보관함에 옮겨두라”는 지시에 후빈 씨는 속수무책으로 조종당했습니다.



■ 10시간 넘는 전화통화.. 여유라고는 '카페라테 한 잔'


그리고 고된 일정이 시작됐습니다. 동선은 거주지역인 전북 순창을 시작으로, 인근인 정읍을 거쳐 서울까지 이어졌습니다. 물품 보관함에 돈을 넣을 때까지 전화통화도 10시간 넘게 계속됐습니다.


 

사기범들은 후빈 씨가 카페라테 한잔 마실 여유밖에 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전화가 끊겼습니다. 그게 저녁 8시쯤. 그 뒤로 사기범들은 더는 후빈 씨의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조만간 구속될 거란 불안감에 휩싸인 채 귀가한 후빈 씨. 그 이후는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비극 그대로입니다. 이런 내막이 알려진 건 후빈 씨 휴대전화에 남아있던 10시간 분량의 통화녹음 파일과 메모장 앱에 남긴 유서가 발견되면서부터입니다. 꿈 많던 청년은 본인이 당한 억울한 죽음의 이유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 가짜검사가 만난 '진짜 검사'.. '기업형 조직'의 범죄 경위


그리고 지난해 4월, 김민수 검사를 사칭한 ‘그놈’이 사건 1년여 만에 경찰에 검거됐습니다. 중국에서 MBC 뉴스를 유튜브로 시청한 뒤 급거 귀국해 잠적을 이어온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가짜검사의 인상착의를 파악한 부산경찰청 직원들이 공항 출입국자들의 명부를 하나하나 뒤진 값진 결과였습니다.


‘김민수 검사’를 연기한 서 모 씨(48)는 지난해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1심에서 징역 6년 형 선고가 내려졌습니다. 자신을 검사라고 속였으니 ‘공무원 자격 사칭’과 ‘사기’ 등의 혐의가 적용됐습니다. 현재는 2심 선고를 앞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후빈 씨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게 가짜검사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가짜검사가 속한 범죄단체의 실체에 대해선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 많습니다. 방송뉴스의 한계입니다.


수사기록이 담긴 판결문에서 내용을 발췌해봤습니다. 이 범죄조직이 얼마나 체계적인 질서 아래 움직였는지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조직 내 위계질서

V 조직원들은 총책이나 중간 관리자급 조직원들에게 존댓말

V 총책이나 중간 관리자급 조직원들이 보이스피싱 범행을 지시하면 그에 따라 범행

V 범행 성공·실패 여부를 보고하며, 특이사항이 발생하는 경우 즉시 보고.

V 중국에 입국한 경우 체류 만기일인 3개월 내에는 국내로 복귀하지 못함.



조직원 통솔체계

V 조직원들에게 가명 사용.

V 대한민국 수사기관의 추적이 어려운 위챗, 큐큐 등 메신저를 사용.

V 개인 휴대전화에도 중국 유심칩을 사용(조직원 특정이 어렵도록 조치)

V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 8시에 출근(조퇴·결근 등에 대하여는 관리자급 조직원의 사전승인)

V 근무 중에는 개인 휴대전화 사용을 금지.

V 중국 공안의 단속기간 중에는 외출금지령을 하달.

V 단속이 예상될 경우에는 미리 정보를 입수하여 사무실과 숙소를 즉시 이전.


출처: 지난해 부산지법 판결문



피해자들로부터 가로챈 돈을 나누는 원칙까지 존재했습니다. 피해액 가운데 ‘검찰 수사관’ 역할을 하면 10%, 비중이 큰 ‘검사 역할’에는 15%가 할당됐습니다. 관리자들도 사무실 운영비와 조직원들에게 지급한 걸 뺀 나머지 돈을 각 직급에 따라 일정한 비율로 받은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 개인정보 담긴 'DB'.. 거기에 후빈 씨가 있었다


그럼 김민수 검사는 어떻게 후빈 씨 번호를 알고 전화했을까요? 알고 보니 범죄조직에서 DB, 즉 개인정보가 대량으로 담긴 데이터베이스를 수집하는 관리자가 따로 있었습니다. 입수한 DB를 조직원들에게 배부하면 이걸 토대로 피해자를 물색하는 작업이었습니다. 그중 한 명이 후빈 씨였던 것입니다.


경찰에 따르면 '가짜 김민수 검사'에게 당한 피해자들도 대부분 후빈 씨 같은 20대 청년들인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다만 개인정보 DB가 어떻게 유통됐고 어디서 입수했는지 경위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라고 합니다.


조직원들은 수습 교육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판결문에는 신규 조직원들에게 일종의 대응 매뉴얼이 쥐어졌다는 조사내용도 눈에 띕니다. 여기엔 피해자들을 상대할 때 필요한 대화 수칙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법률 용어를 말하는 노하우를 직접 가르치는 시간도 따로 마련돼 있었습니다. 이렇게 ‘교육과정’을 모두 이수한 사람만 범행에 투입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전화사기를 주제로 지난해 개봉한 영화 <보이스>의 한 장면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습니다. 영화에서도 피해자들은 취업준비생이었고, 병원비 등 돈이 급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개인정보가 담긴 DB를 활용해 조직원들이 전화사기 테마를 기획하고 대본까지 써주는 내용이 담겼죠. 이게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 바다 건너 '현실'이었다는 뜻입니다.



■ 절망 위에 절망이 쌓인다.. "연간 피해액 1조 원 시대"


다시 ‘전화사기 문자’ 이야기로 돌아와 보죠. 평범한 일상을 무너뜨리기 위해 연구하고 작전을 꾸미는 사람들의 얼굴, 떠올리기만 해도 참 섬뜩합니다.


후빈 엄마 정은재 씨가 전화사기 유도 문자를 받은 것도 실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유족인 사실을 알고 범행을 시도했다면 저열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매년 나오는 경찰청 집계는 충격적이면서도 익숙합니다. 재작년 전화사기 피해액은 전국적으로 6400억 원. 지난해는 아직 집계가 덜 됐지만 7월까지 5000억 원이 넘었다고 합니다. 조만간 ‘연간 피해액이 1조 원이 넘었다’는 뉴스를 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전화사기와 공존까지 대비하자는 정책적 제언도 나오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전화사기가 정말 익숙해져야 하는 그런 범죄가 맞는 걸까요?


올해 정은재 씨 가족은 ‘전화사기 피해자 유족’이 된 지 2년이 됐습니다. 지난 22일이 첫째아들의 2주기였습니다. 올해는 납골함 앞에 닭강정을 가져다 놓았습니다. 후빈 씨가 평소 좋아했던 음식이라고 합니다. 전화를 받던 날부터 ‘그날’까지 사흘 동안 후빈 씨가 본인을 위해 쓴 돈은 카페라테 한 잔 값이 전부였습니다. 엄마는 늘 그게 너무나도 가슴에 사무칩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꼭 하고 싶다고 전해왔습니다.


 

“'가짜 김민수' 서 모 씨가 항소까지 해서 형량을 줄이려고 합니다. 반성문은 쓴다는데 행동은 정반대입니다. 반면 저희는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이미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피폐해져서 불행한 삶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서 씨 같은 전화사기 범죄자의 신상을 공개해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고(故) 김후빈 씨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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