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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클래스M] 흙 속에 담긴 지역 이야기 Ⅱ '익산 왕궁리 유적'
2025-05-31 1699
류동현기자
  donghyeon@jm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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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문화는 ‘검이불루 화이불치’로 통합니다.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다’는 의미인데요.


백제의 역사와 문화, 백제 사람들의 혼이 살아 숨 쉬는 익산의 백제역사유적지구는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5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습니다.


그 중심에는 백제 시대, 완전한 형태의 궁성 구조를 갖춘 ‘익산 왕궁리 유적’이 있는데요.


인문 클래스 시즌3, ‘흙 속에 담긴 지역 이야기 Ⅱ’ 오늘은 익산 왕궁리 유적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이충훈 아나운서]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 온다라인문학센터와 함께 우리 주변의 살아있는 이야기를 쉽고 다양하게 즐기는 인문 클래스 시즌3, 전주대학교 역사콘텐츠학과 이상균 교수님과 함께합니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이상균]

안녕하세요. 전주대학교 역사콘텐츠학과 이상균 교수입니다.


[진행자]

인문 클래스 시즌3, 이상균 교수님과 함께하는 두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나눠볼까요?


[이상균]

오늘은 백제의 궁터 유적인 왕궁리 유적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진행자]

오늘은 백제의 왕궁, 왕궁리 유적을 만나볼 텐데요. 이곳은 왕궁과 사찰이 같이 있죠?


[이상균]

그렇습니다. 왕궁리 유적은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에 위치하는데요. 미륵산 동편에서 시작해서 남쪽으로 2㎞ 이상 이어지는 낮은 능선의 하단부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유적은 백제의 왕궁과 후대의 사찰이 있어 시기를 달리해 조성된 복합유적에 해당합니다. 왕궁리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는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진행했습니다.


[진행자]

그렇군요. 왕궁리 유적은 여러 문헌에서 흔적을 찾아볼 수 있죠?


[이상균]

신증동국여지승람 익산군 산천조에 왕궁과 관련된 기록이 있는데요. 군의 남쪽 5리에 있고, 옛 궁궐터로 전한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동국여지지의 익산군 궁기조에도 비슷한 내용이 보입니다. 증보문헌비고, 전라도 읍지 등에도 왕궁평, 왕궁탑, 왕궁정에 대한 기록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또한 김정호의 대동지지에서는 백제 금마지에 무강왕대에 성을 만들고 별도를 두어 금마저라 칭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과 유사한 문헌이 일본에서 발견됐습니다.


[진행자]

교수님, 백제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하려 했다, 천도했다 라는 익산 천도설이 있는데, 그런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기록도 있습니까?


[이상균]

삼국사기에는 익산 천도의 기록이 없기 때문에 익산으로 천도 문제에 대해서 천도설(遷都說), 천도계획설, 별도설(別都說), 이궁설(離宮說), 별궁설(別宮說), 양성제(兩城制) 등 다양한 학설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익산 천도와 관련된 기록이 관세음응험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관세음응험기는 일본 교토의 청연원(靑蓮院)에서 발견된 문서인데요. 관음 신앙의 신비한 체험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백제 관련 기록은 무광왕대에 지모밀지로 천도한 사실과 제석정사가 정관13년(639)에 화재가 난 기록이 있습니다. 지모밀지는 금마의 옛 지명이고, 백제 무왕대에 익산 천도를 밝힌 유일한 기록입니다. 실제로 제석사지와 제석사 유물폐기장을 발굴조사 한 결과 사료와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진행자]

관세음응험기에 익산 천도 기록이 있는 거군요. 게다가 왕궁은 계획적으로 조성됐다는데, 어떤 면에서 그렇습니까?


[이상균]

왕궁을 중심으로 동쪽에 옥룡천, 서쪽에 부상천이 흐르고 있고, 두 하천은 남쪽에서 합쳐지고 있습니다. 하천이 왕궁을 방어하는 해자의 역할을 하는 거죠. 왕궁의 북측에는 미륵산의 아래에 국가사찰인 미륵사, 익산토성, 우측에는 왕실 사찰인 제석사, 좌측에는 무왕과 그 왕비릉인 쌍릉이 배치돼 있습니다. 이는 계획적이고, 고대 도성의 면모를 완전하게 갖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진행자]

하천부터 토성, 사찰, 쌍릉까지 도성의 면모를 갖추기 위한 계획이 다 있었군요. 그럼 왕궁의 위치는 어떻습니까?


[이상균]

왕궁은 북측에서 남향하는 구릉의 능선에 자리하고 있고, 장방형의 형태에 남북 490m, 동서 240m 내외로 높이는 현존 1.2m 정도 남아 있습니다. 남북과 동서의 길이 비율은 2:1로 조성되어 있는데요. 이런 경우는 중국의 위진남북조시기의 낙양성, 업남성이나 일본의 아스카시대 왕궁에서도 보이고 있습니다.


[진행자]

이제 왕궁 안으로 들어가 볼까요? 왕궁 안 공간은 어떤 모습인가요?


[이상균]

왕궁 내의 공간은 남쪽의 전반부는 왕궁의 중심구역인 행정과 생활공간으로 사용되었고, 북쪽 후반부는 후원과 공방시설이 확인됐습니다. 남과 북의 공간비율은 1:1로 조성하고 있습니다. 왕궁은 자연지형을 절토해서 낮은 곳을 복토하고 궁성 건물을 짓기 위해 평탄대지를 조성했습니다. 동서로 제1석축에서 제4석축까지 생활공간을 구분하고 있는데, 이는 왕궁을 조성하기 위해 설계단계부터 전체의 공간에 비례개념을 염두에 두고 치밀하게 계획하였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진행자]

왕궁의 설계단계부터 공간의 비례개념까지 고려하면서 정말 한땀 한땀, 체계적으로 계획을 했군요.


[이상균]

그렇습니다. 왕궁리 유적의 왕궁은 위진남북조시대의 궁성 장단 비율을 충실히 따르면서 그 안에 정원과 후원을 접목해서 백제식으로 변용한 왕궁입니다. 동아시아 전체에서 보아도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하고, 일본 아스카시대 왕궁조성 계획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왕궁리 유적은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은 사비도성 내의 왕궁을 복원하기 위해 참고가 될 수 있는 사례의 유적입니다.


[진행자]

그렇군요. 왕궁리 유적 조사를 통해 발견된 건물터는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이상균]

왕궁리 유적에서는 21기의 건물터가 조사됐고, 이중 백제의 건물지는 14기에 이릅니다. 이 중에 남쪽 중앙 문지의 중심축과 일치하는 대형건물지가 주목됩니다. 이 건물지는 제1석축 앞에 위치하는데요. 토심적심이라는 구조입니다. 토심적심은 초석을 세우기 위해 풍화암반을 파낸 후 점토를 10cm 두께로 번갈아 가며 판축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특이한 구조는 왕궁리 유적 이외에도 사비기의 왕궁인 부여 관북리 유적의 대형건물지에서도 보입니다. 이 건물의 기단 규모는 동서 35.4m, 남북 18.5m이고,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내부 중앙에는 초석이 없는 통칸입니다. 남측 중문의 중심과 대형건물지의 중심축과 일치하고 있어 왕궁의 정전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백제의 왕궁터에서 확인된 건물로는 최대규모입니다.


[진행자]

정전이라면 왕이 정사를 돌보거나 의식을 행하던 곳인데, 정전 건물지가 발견됐군요. 또 왕궁리 유적에서 눈여겨봐야 할 곳은 어디인가요?


[이상균]

대형건물지 주변에서는 많은 기와편이 출토됐는데요. 관심을 끈 기와는 수부(머리 首, 관청 府)라고 새겨져 있는 기와편이 수습됐습니다.


[진행자]

수부가 뭔가요?


[이상균]

수부는 백제 관부에 가장 상위의 관부이고, 왕궁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수부명의 기와가 출토되면 왕의 거처와 중앙행정기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수부명 기와는 왕궁의 북측에 있는 익산토성에서도 발견되고 있어, 왕궁과 관련된 피난성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수부명의 기와는 사비기의 왕궁이 있었던 부여의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에서 출토된 바 있습니다. 이렇듯 부여 관북리 유적과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는 동일한 문양과 기술로 제작된 수막새나 암키와가 공통적으로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같은 기와틀로 찍어낸 것도 있는데, 이는 백제 관청 직속의 장인들이 부여와 익산에서도 참여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행자]

‘수부’라고 새겨진 기와 출토는 여러 의미를 담고 있군요. 왕궁에서 정원을 빼놓을 수 없는데, 정원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궁금합니다.


[이상균]

정원은 후원과 연결되는 왕궁 전체 면적의 중간지점인 제4석축에 연결되어 동편에 치우쳐 있는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괴석과 장대석, 강돌, 화강석을 이용해 물이 흘러 내리게 만들었습니다. 정원의 북측에는 물을 끌어들이는 수로와 저수조가 확인됐고, 물의 공급과 조절을 위한 시설이 조사됐습니다. 정자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건물지의 초석이 남아 있어, 왕궁의 휴게공간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서 발견된 사암제 정원석은 중국이 원산지로 여겨지는데요. 고급 정원석을 수입해 왕궁의 정원과 후원을 꾸민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진행자]

요즘으로 말하면 정원의 분수가 있었던 거네요. 게다가 수입한 고급 정원석까지, 대단합니다. 이번에는 왕궁리 유적, 어디를 둘러볼까요?


[이상균]

왕궁 내의 북동쪽 후반부는 왕궁에서 가장 높은 지역이고, 이곳에 후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후원 가운데에서는 왕궁 일대를 조망할 수 있는 건물지가 조사됐습니다. 주요 시설로는 구릉의 정상 부위를 감싼 U자형 환수구, 곡수로, 배수시설 등이 조사됐고요. 왕궁의 전각건물과 공방구역에 용수를 공급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후원의 크고 작은 물길은 조경과 유수 관리의 기능을 복합적으로 수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진행자]

후원은 조경과 유수 관리를 겸한 곳이었군요. 그밖에 왕궁리 유적에는 어떤 시설이 있습니까?


[이상균]

왕궁의 북서측에 왕실의 의식, 의례 등의 사용되는 물품을 자체 생산하기 위한 공방시설로 보이는 공방폐기지, 소토구, 석벽시설 등이 확인되었고, 이곳에서 금, 유리, 청동의 제련, 용해와 관련된 다양한 도가니 등이 수습됐습니다. 유물은 금, 은, 동, 유리 도가니와 함께 금편, 금판, 금실, 금고리, 금박, 금구슬, 금막대, 금못, 금덩이가 출토됐습니다. 이 외에도 청동제품, 철제품, 옥제품, 유리제품, 막새류, 기와류, 토기류가 수습됐는데요. 왕궁 내에서 필요한 금, 유리, 청동제품을 생산해서 생활필수품이나 의례, 의식에 직접 조달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 왕궁의 근처에 위치한 미륵사, 제석사 등 주변에도 귀중품을 공급하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진행자]

공방시설이 있었다면, 이것을 만드는 장인들도 있었을 텐데요?


[이상균]

그렇죠. 공방시설은 왕궁에 귀중품을 공급하기 위하여 국가 주도하에 운영된 것으로 보이고, 대규모 공방과 함께 전문적인 장인기술 집단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금, 은, 동의 제련 이외에도 귀금속의 세공이 이루어졌고, 세공기법, 납땜 기법 등 고도의 기술이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백제의 금속 제작기법은 일본으로 전파됐는데, 고대 공방유적인 아스카이케(飛鳥池)유적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진행자]

그야말로 고도의 기술이 집적된 공방시설이 갖춰져 있었군요. 교수님, 그때나 지금이나 생리현상을 해결하는 건 당연한 이치인데요. 왕궁리 유적에 화장실 시설도 갖춰져 있습니까?


[이상균]

물론입니다. 화장실은 유적의 서북편 동서석축 배수로의 남측에서 각기 다른 규모로 3기가 조사됐습니다. 지금까지 확인된 화장실 중 가장 오래된 것인데요. 화장실은 중심영역에 비해 낮은 지역에 위치하고 서측 담장에 인접해 있어 격리되어 있습니다. 화장실은 석축배수로와 연결되어 오물이 차면 배수로를 통해 왕궁의 담장 밖으로 빠져나가게 설계되어 있어 정화조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장방형으로 구덩이를 파고 벽에 붙여서 일정한 간격으로 발판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는 나무기둥을 세웠습니다. 가장 큰 화장실은 동서 10.8m, 남북 1.7m 정도이고, 나무기둥의 간격으로 보아 5칸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중앙의 화장실은 3칸, 동측의 화장실은 1칸입니다.


[진행자]

왕궁리 유적의 화장실은 가장 오래된 고대의 화장실이네요.


[이상균]

화장실의 내부에서는 목제품, 뒤처리용 막대, 짚신, 연화문 수막새 토기편이 수습됐습니다. 바닥에서는 밤껍질, 콩류, 참외씨, 굴껍질 등이 출토됐는데요. 내부의 흙을 채취해 검사한 결과 오염된 채소를 먹었을 때 생기는 회충과 편충이 발견되었고요, 민물고기를 생식했을 때 나타나는 간흡충, 육식고기에서 감염되는 조충란 등의 기생충알이 확인돼서 기생충 감염의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분석을 통해 백제인들의 질병 상태와 식생활 등의 생활상을 복원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를 확보했습니다.


[진행자]

백제인의 식생활과 질병 상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군요. 그럼 이번에는 왕궁의 부엌시설을 살펴볼까요?


[이상균]

왕궁의 부엌시설은 대형건물지의 서남편에서 남북길이 12m 정도의 장방형 건물지가 조사됐습니다. 왕궁의 부엌터로 조사된 사례로는 최초인데요. 건물 내의 타원형 구덩이에서는 음식물을 조리하기 위한 철제솥, 식재료나 액체를 담아두는 어깨가 넓은 광견호(廣肩壺), 목이 짧은 병인 단경호(短頸壺), 숫돌 등이 출토됐습니다. 이곳에서 검붉게 변한 벽체와 다량의 숯이 발견되어 부엌으로 사용된 것임을 알 수 있는데요. 이 건물지는 일본의 고대 건물과의 유사한 점이 주목되고 있습니다.


[진행자]

왕궁에서 부엌이 조사된 것 역시, 최초군요. 왕궁리 유적의 시설을 쭉 살펴봤는데요. 왕궁 위에 사찰이 세워진 연유는 무엇인가요?


[이상균]

무왕 대에 건립된 왕궁은 후대에 왕궁의 시설을 헐어내고 그 위에 금당지, 강당지, 오층석탑 등 사찰시설이 들어섰습니다. 탑과 금당, 강당의 남북 중심축은 일직선상에 위치하고, 중문의 중심축과도 연결되어 있어 왕궁의 중심축을 그대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왕궁의 담장이 있어 회랑은 따로 설치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사찰 주변에서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 통일신라기의 것인데요. 왕궁 위의 사찰건립은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후에 백제의 근엄을 나타내는 왕궁의 건물을 헐어내고 불력의 힘으로 백제의 기운을 누른다는 취지에서 건립된 것으로 보입니다. 사찰은 이후 관궁사, 대관관사, 미륵사 등의 사찰명으로 고려, 조선시대까지 운영됐습니다.


[진행자]

왕궁 위에 건립된 사찰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이상균]

사찰 관련 유구는 5층 석탑과 금당지, 강당지가 있습니다. 사찰의 중심건물인 금당지는 5층 석탑의 북쪽에 있고, 건물의 규모는 동서 23m, 남북 16m 정도, 정면 5칸, 측면 4칸입니다. 금당지의 기단 외부에서는 백제와 통일신라기의 유물이 같이 출토됐습니다. 백제의 연화문 수막새, 당초문 암막새, 인장와, 사찰 명기와, 치미편, 각종 토기류가 출토됐습니다. 이 중에 백제의 유물은 구덩이를 파고 매몰한 상태로 폐기했습니다. 따라서 사찰을 건립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백제의 건물을 헐어내고 거기에서 나온 유물들은 일괄 폐기한 것으로 보입니다.


[진행자]

그렇군요. 국보인 왕궁리 5층 석탑도 살펴볼까요?


[이상균]

왕궁리 5층 석탑은 사찰을 조성하면서 주변의 건물을 철거하고 평탄대지를 조성한 후에 건립했습니다. 석탑의 외측 4면에서 하부 토층검사를 진행하였는데, 서측 지대석 하부조사에서 2.2m까지 점토나 마사토로 층을 교대로 한 43개의 판축층이 확인됐습니다. 판축층 아래 1.9m 지점에서는 화강석이 빈틈없이 깔려있는데, 왕궁과 관련된 것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석탑의 기단은 지대석 위에 기단석과 면석, 그리고 기단갑석으로 구성되어 있고, 탑신은 5층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석탑은 백제 왕궁이 사찰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백제의 목탑이 석탑으로 이행되는 과정을 살필 수 있습니다.


[진행자]

왕궁리 5층 석탑에서는 사리장엄구가 출토되기도 했죠?


[이상균]

이 탑에서는 1965년 왕궁리 5층 석탑을 해체・수리할 때, 1층 옥개석 윗면의 사각형 홈 안에서 금제금강경판, 금동사리함, 금동불상, 사리병 등이 발견됐습니다. 금제금강경판을 비롯한 사리관련 유물은 국보로 지정되어 5층 석탑과 함께 2개의 국보를 보유하게 됐습니다. 이중 금제금강경판은 금동함 속에 들어 있었고, 경판 19매는 좌우 두 곳에서 경첩으로 연결해 금띠로 묶었습니다. 은판에 금도금한 경판 각 면에는 17행에 걸쳐 5,400여 자의 금강경 일부를 베껴 쓴 것입니다. 사리장엄구는 통일신라에서 고려에 이르는 시기의 사리 신앙에 관한 구체적 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 유물입니다.


[진행자]

익산 왕궁리 유적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죠?


[이상균]

왕궁리 유적과 익산미륵사지는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는데요. 이때 백제역사지구로 공주의 공산성, 송산리고분, 부여의 정림사지, 능산리고분,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나성과 더불어 8개소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진행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왕궁리 유적의 의의는 무엇일까요?


[이상균]

왕궁리 유적의 왕궁은 정전급의 대형건물지와 정원, 후원, 공방지, 화장실 유구는 수준 높은 왕실문화와 금속공예 기술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어 세계문화유산으로의 가치를 인정받았습니다.


[진행자]

이와 연계해서 익산의 백제역사지구 가운데 세계문화유산에 포함됐으면 하는 것들은 어떤 게 있을까요?


[이상균]

천도를 위해서는 왕궁, 왕사, 종묘적인 사찰, 왕릉, 성곽 등이 세트로 존재해야 합니다. 따라서 왕궁의 왕궁리 유적과 왕사의 미륵사지 외에도 왕궁의 종묘 역할을 담당했던 제석사지, 익산 천도에 직접 관여한 무왕과 왕비의 고분인 익산 쌍릉, 수부의 기와가 출토되어 왕궁의 피난성으로 주목되는 익산토성의 유적이 세계문화유산에 포함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지역민 모두의 관심과 지정을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진행자]

백제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익산 왕궁리 유적의 이모저모를 살펴본 유익한 시간이었는데요. 교수님, 우리 지역에 있는 송천동 유적과 익산 왕궁리 유적을 2회에 걸쳐 방송해 주셨는데요. 소감이 어떠신가요?


[이상균]

선사, 고대의 우리 지역 유적이 소외되어 온 감이 있었는데, 방송을 통하여 유적의 중요성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역사유적에 많은 관심 가져주시고, 또 직접 견학하셔서 우리 선조들의 숨결을 느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진행자]

우리 지역 유적을 통해 과거의 역사와 문화를 만나는 흥미로운 여정이었습니다.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 온다라인문학센터와 함께 우리 지역의 인문학을 쉽고 다양하게 즐기는 인문 클래스 시즌3, 오늘은 전주대학교 역사콘텐츠학과 이상균 교수님과 함께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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