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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수첩] 박세리도 울고, 새만금도 울었다
2024-06-20 2107
조수영기자
  jaws0@naver.com

[전주MBC 자료사진]

“박 프로의 모습을 보니까 안타까워서, 막을 수 없었는지 알고 싶어서 질문합니다.”


그제(18일) 기자회견장에서 철옹성처럼 감정을 숨기던 골프여제가 결국 울음을 터뜨린 건, 베테랑 골프기자의 간단한 질문 때문이었습니다.


■ "새만금 국제골프학교, 알고보니 가짜 계획" 


사태의 시작은 박세리 씨가 이사장으로 이끌고 있는 비영리재단 ‘박세리희망재단’이 지난주 발표한 보도자료였습니다.


누군가 박세리 이사장의 이름을 무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광고를 확인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재단 측이 밝힌 문제의 당사자는 놀랍게도 박세리 씨의 아버지였습니다.


이미 지난해 사문서 위조 등의 혐의로 형사 고소했고, 검찰 수사가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국제골프학교’ 설립 사업에 재단 명의의 참가의향서를 허위로 써낸 혐의였습니다.


재단 측은 그러면서 “새만금을 포함해 전국 어느 곳에도 ‘박세리 국제학교’ 설립 계획도, 예정도 없다”고 덧붙였습니다.


■ 박세리 父女갈등 너머 '새만금'


세간의 관심은 골프여제를 배출한 집안의 부녀갈등에 맞춰졌습니다.


그런데 취재진이 주목한 건, ‘새만금’이었습니다.


박 씨 부친이 작성했다는 허위서류가 도대체 전체 409㎢, 여의도의 140배라는 광활한 새만금 땅 가운데 '어떤 사업'에 제출된 것인지 살펴보기로 한 것입니다.


알고 보니 국토교통부 산하 새만금개발청이 주관한 민간투자개발 사업이었습니다.


■ "해양 골프장, 국제골프학교".. 3천억대 개발계획


지난 2022년, 건축사사무소와 투자증권사, 건설사 등 6개 회사로 구성된 컨소시엄이 우선협상자로 선정돼 새만금 관광개발의 청사진이 발표됐습니다.


민간사업자가 해양 골프장 같은 관광레저시설과 골프풀빌라 등 주거숙박시설은 물론 국제골프학교까지 조성한다는 개발계획이었습니다.


1.64㎢, 축구장 200개가 넘는 규모였습니다.


민간사업자가 자금을 조달해 투자하겠다고 공언한 투자액이 확인결과 무려 3,000억대에 달했습니다.


■ 사업계획 종합심사? 악마는 '디테일'에


정부는 당시 본 계약에 앞서, 해당 사업자를 우선협상자로 선정하는 과정에서 “사업계획을 종합적으로 심사했다”고 공식자료를 통해 밝혔습니다.


하지만 악마는 디테일에 있었습니다.


사업계획 가운데 우선협상자 심사과정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것으로 전해진 ‘국제골프학교’가 문제였습니다.


새만금개발청은 박세리희망재단이 총 3,000억대 사업에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지만, 뒤늦게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재단에 진위여부를 확인한 결과, 박세리 씨 부친이 재단 명의로 써낸 참여의향서는 재단의 뜻과 무관한 서류였고 도장까지 가짜였던 것입니다.


새만금개발청 관계자는 일부 언론과 인터뷰에서 “박 씨 부친은 박세리희망재단 명함을 들고 다니며 사업계획 발표에도 참여했다”며 속을 수밖에 없었다는 입장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박 씨 부친이 재단에서 실제론 아무런 직위도 맡지 않았기에 법인등기만 살폈어도, 재단의 인감증명서만 요구했더라면 충분히 진위를 의심해볼 수 있었습니다.


실제 박세리희망재단이 공개한 재단명의의 진짜 인감과 박 씨 부친의 가짜 인감은 한눈에 봐도 분간할 정도로 차이가 컸습니다.


■ 허위서류 한 장에 무산.. "국고손실 없어 다행(?)"


우선협상은 결국 취소됐고, 사업은 2년 만에 없던 일이 됐습니다.


명색이 정부가 추진한 3천억대 사업이 가짜서류 한 장에 무산된 꼴입니다.


재작년 민간전문가와 공무원들로 구성된 평가심의위원회의 종합심사를 거쳐 우선협상자를 선정했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했지만, ‘박세리’라는 신기루에 속아 가장 기초적인 검증에 소홀했습니다.


문제는 결과적으로 사업을 2년이나 지체시킨 새만금개발청의 책임 있는 해명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속도감 있는 새만금 개발이란 설립취지와 본령은 나 몰라라한 채 “국고손실은 전혀 없었다”는 공식입장이 과연 적절했는지도 곱씹어볼 대목입니다.


■ '지침 위반' 무기한 협상에서 드러난 '허위 계획' 


개발청이 우선협상자로 선정한 민간사업자와의 협상 과정에서, 사업자 선정지침을 위반해가며 사실상 무기한 협상을 이어간 사실까지 드러난 상황입니다.


지침에 따르면 사업계획을 검증하는 우선협상기간은 단 3개월뿐이었습니다.


필요한 경우 1개월까지 연장이 가능하도록 했지만, 2년 가까이 협상만 이어갔던 것입니다.


‘박세리국제골프학교’ 사업계획의 허위를 인지한 것도 우선협상 1년 3개월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지침대로 3개월 동안 엄격한 검증에 나섰다면, 적어도 시간낭비는 막았을 거란 뜻입니다.


■ 다른 새만금 메가 프로젝트들도 줄줄이 '터덕'


새만금개발청이 추진한 또 다른 새만금 개발 프로젝트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습니다.


3년 전 기대감을 한껏 고조시켰던 1조 원대 새만금 관광개발 민간사업, 3년 만에 뚜껑을 열어봤더니 그대로였습니다.


민간사업자와 우선협상만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관련 사업자 선정 지침을 봤더니 아예 협상기한조차 없었습니다.


■ 새만금개발청은 늘 '협상 중'?.. 소송까지 휘말려 


지난 2021년부터 추진된 또 다른 첨단복합산업단지 개발사업은, 확인 결과 더 커다란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새만금 부지 2.5㎢, 축구장 350여 개 면적에 3000억대 민간자본을 끌어와 신재생에너지 전진기지를 조성하는 내용으로, 역시 지역사회의 기대가 컸던 사업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2021년 개발계획을 발표한 민간사업자 측이 올 초 새만금개발청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새만금개발청이 ‘사업지연’을 이유로 우선협상을 취소한 게 발단이었습니다.


우선협상 2년이 넘도록 사업추진이 불확실하다며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다는 게 개발청 입장입니다.


■ '무기한 협상' 용인하는 개발청.. 속도감 있는 개발은 어디로?


그런데 사업자 선정지침에는 우선협상 기한이 명시돼 있지 않았습니다.


사업이 지연됐다고 판단할 근거가 없다는 뜻입니다.


민간사업자 측이 바로 이 점을 파고들며 소송전에 돌입했습니다.


사업지연은 개발청의 일방적 주장이라며, 우선협상자 지위를 돌려달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무기한 협상’의 길을 열어준 새만금개발청의 허술한 지침은 소송에 빌미를 제공한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제는 기약 없는 소송으로 행정력을 쏟는 건 기본, 개발 청사진까지 송두리째 발이 묶일 상황이 됐습니다.


■ 언제까지 '무산의 땅'으로 남길 건가


올해로 35년을 맞는 새만금 사업은 지역 숙원사업이면서 동시에 유서 깊은 ‘무산의 역사'로, 전북 지역의 열패감만 높인다는 지적을 받습니다.


다행히 최근 2년여 동안 새만금산업단지에 날아든 유례없는 10조 원대 기업투자로 천덕꾸러기 이미지를 벗어나며 전기가 마련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밖에 대형 민간개발 프로젝트는 예나 지금이나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민간사업자들이 PF금융을 통해 거금을 조달해야 하는 형편이라, 고금리가 지속되는 여건 속에 기대감은 그리 높지 않습니다.


■ '박세리 논란'이 새만금개발에 던지는 질문


그래서 본 계약으로 가는 첫 단추인 우선협상자 선정 과정부터 현실성 있는 사업계획이 채택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극히 결과론적이지만 새만금개발청이 제대로 검증했다면, 박세리 부친의 허위서류는 걸러졌을 것이고, 박세리 씨가 부친을 탓하며 눈물을 흘리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광활한 부지를 기약 없이 빈 땅으로 놀리는 일도 없었겠죠.


그런 의미에서, 이번 사태의 또 다른 피해자는 다름 아닌 ‘새만금’입니다.


골프여제를 울컥하게 한 이 질문, 새만금개발청에게 그대로 돌려주고 싶습니다.


'안타깝습니다. 막을 수 없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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