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병천피디님. 윤 승희. 이덕형님. 김 난수님. 이 지현님 무더운 날씨에
고생 많으시죠? 더운만큼 좋은 추억도 많으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연일 계속되는 무더위에 호박잎도 옥수수잎도 뜨거운 물에 데인것처럼 축 늘어진채 숨쉬는것조차 힘이 들어 보입니다. 어제 오후에는 서쪽하늘에 손바닦만한 구름이 보이더니 점점커져 순식간에 주변이 캄캄해졌습니다. 10여분 쏟아진 소나기에 또랑물이 흙탕물이 되고 산과들은 새수를 한것처럼 깨끗해졌습니다. 산이 마을앞으로 몇발자국 걸어온것처럼 가까워 보입니다. 인삼밭에 가기위해 산길을 걸었습니다. 파란 가을하늘빛을 닮은 산도라지가 꽃을 피웠습니다. 몽우리진것 몇개를 손으로 터트려 보았습니다. 펑펑 소리를 냅니다. 그 소리에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35년전의 일입니다. 키 150cm도 안되고 몸무게도 40kg정도의 저의 아버지는 힘든 농사일 하기에는 채력이 따라 주지 않았습니다. 45세에 아내를 저 세상에 보내고 남겨진 5남매에 슬퍼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계절적으로 이때쯤 되나 봅니다. 아버지는 아침일찍 감자 몇덩이 가지고 이곳 진안. 안천에서 무주쪽까지 걸어서 산에 도라지를 캐려 다녔습니다. 방학기간인 우리 5남매는 배나무 그늘 아래에서 대나무로 뾰족하게 칼을 만들어 아버지가 캐온 도라지 껍질 벗기는 일을 했습니다. 나중에는 손톱사이가 벌어져 물만 닿아도 쓰리고 아팠습니다. 껍질 벗긴 도라지는 햇빛에 몇일 말려 읍내 장날에 내다 팔아서 밀가루나 보리쌀을 사오셨습니다. 그런데 도라지캐려 가면 저녁 늦게나 오시던 아버지가 해가 하늘 중간에 있는데 오셨습니다. 얼굴이 퉁퉁부어서 눈도 보이지 않고 코와 입도 구분이 되지 않았습니다. 벌집을 잘못 건드려 얼굴과 온몸의 여러곳에 벌에 쏘였다는 겁니다. 8월의 무더운 날씨인데 온몸이 춥다며 이불을 뒤집어 쓰고 끙끙 알으셨습니다. 우리 5남매는 모처럼의 방학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도라지 껍질벗기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방죽에가서 수영도 하고 높은 나무에 그네를 만들어 타기도 하고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았습니다. 한이틀 고생하시던 아버지는 부기도 덜 빠진 몸으로 또 도라지를 캐려 가셨습니다. 그 무렵 우리의 유일한 재산인 400여평의 밭에 수박을 심었습니다. 돈이 귀한 시절 보리쌀을 가져와서 수박으로 가져 갔습니다. 아버지는 가족이 많은 집에는 한덩이를 더 주웠습니다. 아버지의 후한 인심에 다른 마을에서도 수박을 사려 왔습니다. 어느날 친구와 수박서리를 하기로 했습니다. 아버지가 수박밭에 없는 틈을 타서 우리밭을 습격하였습니다. 그가 망을 보고 지리에 익숙한 내가 그 밭에서 가장크고 좋은것으로 따서 냇가로 갔습니다. 우린 주먹으로 수박을 깨서 배가 부를때까지 먹고 나머지는 냇가 풀밭에 던져 버렸습니다. 그날 저녁 아버지가 한숨을 쉬며 걱정을 하였습니다. "그 수박은 내년에 씨 할라고 키워 놓은건디 어느놈이 따가 버렸당게.
내년 수박농사는 망쳐 버렸어" 그 당시에는 모든 농사가 씨앗을 종묘사에서 사서 하는게 아니고 좋은 열매를 받아 놓았다가 다음해에 종자로 썼습니다. (농사꾼은 굶어 죽을 망정 종자는 머리맡에 두고 죽는다는 ) 이야기도 있습니다. 아버지의 내년 걱정보다는 내가 수박서리 했다는것을 눈치채지 못한것 같아 마음이 놓였습니다. 그 다음해에 수박 농사는 어떻게 했는지 기억나지 않고 그때 내가 수박서리 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모르는채 하셨으리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지금은 저세상에 계시지만 아버지 그때 죄송합니다. 10여일 있으면 아버지가 아끼시던 점터밭에 심은 수박이 읶을 겁니다. 그때 제일크고 좋은수박을 따가지고 아이들데리고 산소에 가겠습니다. 그래도 그때의 말썽꾸러기 제가 해마다 아버지산소 벌초하쟎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