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는 몰랐습니다. 왜 우리집에는 부모님의 결혼사진이 없었는지. 그 때 엄마께 "엄마랑 아빠 결혼사진은 어디있어?"라고 물어보면 그럴 때마다 엄마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시면서 "나중에 보배가 크면 같이 하려고~"라고 하셨죠. 하지만 사춘기가 지나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나중에 돈 벌면 꼭 결혼식 하겠노라고 아버지께서 습관처럼 말씀하셨기 때문이죠.
한창 엄마의 손길이 필요했던 시절, 저희 엄마는 그 손길을 되어야 했습니다. 일찍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대신해 외삼촌과 이모를 돌보아야 했기 때문이었죠. 사춘기가 채 시작되기도 전부터 남의 집 식모살이며 공장의 공순이까지. 엄마는 그 때 친구들이 너무 부러웠었다고 해요. 아침마다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친구들을 볼 때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 너무나 고통스러웠지만 집에 있는 동생들을 생각하면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고 하셨죠.
그래도 그 때 그렇게 고생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아빠를 만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하시며 웃으십니다. 농담 삼아 "니 아빠가 과수원집 아들 철수가 될 뻔했지."라고 말이죠.
그렇게 22살에 아버지를 만나 사랑을 혼수 삼고 집 삼아 결혼생활을 꾸려나가셨어요. 그 때 아버지는 강원도에서 광부로 일하고 계셨고 엄마의 신혼생활도 강원도에서 시작하게 되셨죠. 아버지의 월급으로 알뜰하게 생활하며 면사포 쓸 날만 기다리셨다는 엄마. 하지만 우리집의 맏이인 제가 태어나게 되었고 더욱 빠듯해진 살림에 면사포를 쓴다는 생각은 마음 속에 곱게 접어놓게 되었죠. 그리고 여동생이 생기고 나서는 살림만 하던 엄마도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안정되던 생활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습니다. 제가 열 살 되던 해에 탄광에서 일하시던 아버지가 사고를 당하신거였습니다. 허리를 다쳐 더 이상 광산에서 일할 수 없게 되신 아버지는 병원에서 지내는 시간들이 길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해 저희 가족은 아버지의 고향인 전북 김제로 이사 오게 되었고 식구도 둘이나 더 늘어났습니다. 할머니와 바로 남동생이었죠. 할머니를 모시고 직장생활에 어린 남동생까지 키우셨던 엄마. 엄마 두 손에 매달려 어리광을 부리던 큰 딸도 이젠 다 자라 26살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꿈이었던 결혼식. 하지만 이제는 제가 결혼식을 올려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꼭 면사포 씌워주겠노라 얘기 했던 남자도 한 가정의 가장으로 한 여자의 남편으로 아이들의 아버지로 살면서 거짓말이 되어버렸습니다. 언젠가는 꼭 하이얀 웨딩드레스를 입겠다던 여자의 마음에 곱게 넣어둔 꿈에는 하얗게 먼지가 내려앉았습니다.
이제는 세월이 흘러 그 당시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은 단단히 굳어져 믿음이 되었습니다. 그 믿음으로 지금까지 가정을 꾸려오신 저희 부모님. 미안하다, 고맙다, 사랑한다는 말 대신 농담을 건네며 서로의 얼굴에 웃음 짓게 만드시는 저희 부모님. 이제는 그 믿음에 축복을 안겨드리고 싶습니다.
결혼기념일이 없어 항상 아무날짜나 적어내는 저희 부모님께 이제라도 결혼기념일을 만들어 드리고 싶습니다. 승희님, 덕형님 아무쪼록 저희 부모님 결혼기념일이 6월 19일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세요. 꼭 부탁드리겠습니다.
자랑스런 엄마 아빠의 큰 딸 이보배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