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설날엔...

이제 3일만 지나면 우리의 대명절인 설날이 다가오네요. 어릴적 내 기억속 설날은 몇날몇일 너무나 손꼽아 기다려지던 즐거운 명절로 기억되는데 이제 제나이 40을 바라보는 지금의 설날을 표현하라면 ...‘아! 또 교통채증으로 언제 집에 도착하려나?...조카녀석들 새뱃돈 얼마씩이나 줘야하나? 라며 걱정아닌 걱정을 넌스레 해봅니다. 지금의 아이들 설날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그냥 단지 친척들로부터 새배 한번하면 의례히 주어지는 배춧잎 한 장 또는 그이상의 고소득을 올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의 날로만 기억될까요? 어릴적 그때의 설날은 정말 즐거운 날 이었는데 말이죠. 이제 기억조차 희미해지는 30여년전 그때의 설날즈음...제 기억으로 초등학교적 시골에 살았던 저는 목욕이라는 낯선 문화에 익숙치않았고 동네친구들도 그랬듯 저또한 설날이 다가올때면 어머니는 부엌에서 물을 가득 솥단지에 부어넣고 장작불로 한시간 남짓 불을지펴 솥단지 표면에 진땀이 흠뻑 베일때쯤 안방에서 텔레비젼을 보고있던 저에게 “막둥아 목깐(목욕)하게 부엌으로 언능 나와라 잉?”하고 소리를 지르시죠. 저는 그러면 언제나 그랬듯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않은 알몸으로 뜨끈뜨끈하게 물이 담겨져있는 큰다라이 속으로 풍덩하고 미끄러져 들어가 때가 적당히 불을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고있죠, 잠시후 어머니는 양손을 힘차게 탁탁 부딪치신후 그 억센 손목으로 저의 몸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니면 조그만 몸뚱아리에선 어디서 나오는지 모를 국수가닥같은 굵디굵은 때가 후두둑 다라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얼마되지않아 그 큰다라이속은 물반 땟물반이 되곤하였죠. 목욕할날이 언제가될지 기약이 없던터라 어머닌 더욱더 제몸에 달라붙은 자그만 때 하나까지 다 벗겨버리실듯 세차게 밀고 또 밀으셨죠, 제몸이 시뻘겋게 될즈음이 되어서야 그 손놀림은 멈추셨고 그제서야 제 등짝을 찰싹 내리치시며 “아이구 이놈 때좀봐. 이제 깨깟하게 벗겨씅게 몸이 날아갈듯 가벼워지겄다”며 남겨놓으신 깨끗한 물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헹굼을 해주시고서야 목욕을 마무리하셨죠. 그 목욕이 끝나야만 설준비를 마쳤다고해야 할까요. 설 전날엔 아침일찍 밥을 먹고 설을 지내러 큰아버지댁인 금산에 가기위해 저를 비롯 아버지, 어머니, 형들과 함께 콩나물 시루속같이 빡빡하게 들어선 인파의 버스에 몸을 맡긴체 겨우겨우 숨만 쉬어가며 굽이굽이 산등성이를 넘고넘어 5시간 가까이 탈탈거리는 비포장 도로를 달린뒤에야 비로소 큰집 안마당에 도착을한답니다.. 그래도 뭐가 그리 신났던지 저는 정류장에 내리자마자 곧장 한달음에 큰집 안마당까지 뛰어들어 맨먼저 큰집식구들과 상면을 하곤했죠. 큰아버지댁에 도착했을땐 이미 도착해 식혜 한사발로 목을 축이고 계시던 둘째 큰아버지댁에서 저희 가족들을 반갑게 맞아주셨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질무렵 언제 나가셨는지 큰아버지는 설을 쇠러 온 친척들이 행여나 밤새 춥게 잘까봐 뒷산에 오르셔서 굵디굵은 땔감이며 잔나무가지를 한짐가득 해온것을 부엌안에다 내려놓으시며 언제나처럼 “길도 험한디 오느라고 고생들혔다”는 말을 잊지않으셨죠. 큰집은 안방을 포함해 고작 3개의 방이 있었는데 큰집식구를 포함해 세가족이 모이는 설날은 20여명 가까운 대가족이 구성되어 잠자리가 턱없이 부족했을터인데 그때 그시설엔 어떻게 잠을 잤을까 아리송해지지만 아무튼 이곳저곳에 끼고 채이며 무사히 하룻밤을 넘기곤했었죠.. 밤새 안방에선 큰아버지를 비롯 어른들께서 큰어머니가 손수 빗으신 곡주를 늦은 밤까지 드시며 그동안 못나눴던 형제간의 이야기 꽃을 피우시고, 바로 옆 골방에선 큰어머니를 비롯 여자분들은 음식장만하느라 밤새 도막 토닥이는 소리가 끊이질않고 마루를 건너 옆 사랑방에선 형들과 사촌형들이 주우욱 둘러앉아 하얗게 이곳저곳이 변색된 화투를 바닥에 내리치는 소리가 밤새 이어지고, 저같은 꼬마들은 마당옆에 있는 소죽을 끓이던 아궁이 앞에 모여앉아 큰아버지가 농사지신 고구마를 시렁에서 찾아내와 벌겋게 달궈진 아궁이 숯덩이속으로 고구마를 던지고 한참을 놔둔후 어느정도 익었겠다 싶을때 부지깽이를 찾아와 시커먼 숯을 이리저리 휘저어 새까맣게 탄 군고구마를 건져내 호~호 불어가며 입언저리 주변이 온통 새까맣게 변하는줄 모르고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록새록 되살아납니다. 이튿날 설날 아침엔 더욱더 분주하게 시작이되었죠, 그당시 보일러도없던 시절, 이른 새벽부터 세면에 사용할 물을 한솥가득 끓여놓으면 큰아버지를 비롯하여 어른들이 거의 다 사용하시고 얼마남지않은 그 따끈한 물을 사용하기위해 미리 선수 쳐보지만 언제나 그렇듯 제 앞에 놓이는것은 얼음장같이 차가운 지하수뿐, 어린 저에게 그 혜택이 주어진다는것은 애초부터 없던것이죠. 너무나 손이 시려워 고양이 세수로 대충 몇 번 문지르고 난후 잽싸게 방으로 뛰어들어 이불속에 한참을 그렇게 넣고난 후에야 차례를 지낼 시간이 다가왔죠. 차례를 지내고 아침밥을 먹고나면 골방에선 큰어머니가 작은집에 보낼 음식 이것저것을 보따리에 싸느라 정신없이 분주해지고 하루에 세번밖에 오지않는 읍내나가는 버스를 행여나 놓칠세라 후다닥 옷을 챙겨입고 대문밖에 나와 버스를 기다리며 짧지만 즐거웠던 시간을 뒤로한체 작별의 시간을 맞이해야했지요. 그떄와 비교하면 지금의 설은 너무나 많이 변해버린 것 같아요. 정말 그때 그시절 명절은 너무 즐거운 시간들이었는데 요사인 명절날 해외여행을 간다죠? 며칠전 초등학교 3학년인 저의 큰아들놈이 “아빠 이번 설날에 세배돈 많+이 받아서 닌텐도DS 살거야”라고 하네요. 오로지 명절이라는 것이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요즘 아이들의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전주MBC 여성시대를 사랑하는 애청자 여러분 무자년 새해 행복하시고 복많이 받으세요. 감사합니다. 충남 공주시 신관동 주공@ 505-1301호 (011-9217-3236) 정 채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