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머니의 아픈 손가락
양영숙
어머니는 종종 나를 이야기할 때 `아픈 손가락`이었다고 하신다. 그럴 때마다 왜 그럴까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결혼해서 세 딸을 낳고서야 조금씩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 할 수 있었다. 세 딸 중에 어렸을 때 편식도 심하고 먹는 양도 적은 둘째딸이 있다. 큰딸과 둘째가 싸울 때면 약한 애와 싸운다며 큰딸에게 채찍질도 가했다. 우리 부부는 둘째가 편식하지 말고 잘 먹어서 건강하기를 바랐었다. 공부는 제법 잘 했지만 몸 약한 둘째가 항상 안쓰러웠다.
내가 세살 때 소아마비로 왼발과 왼손이 불편하여 뒤뚱뒤뚱 걷는 모습이 어머니 보시기에 애처로웠으리라 생각된다. 우리 집에서 초등학교 가는 길은 멀었다. 언덕을 넘어 긴 논둑길을 따라 거의 한 시간정도 걸어야 도착했다. 어머니는 그때를 회상하며 내가 `열심히 학교에 다니는 모습이 고마웠다`고 한다. 장사 일에 바빠서 돌보지 못함을 미안해 하셨다.
초등학교 생활에서 제일 싫은 것은 운동회 날과 아침 조회시간이었다. 어린이회장의 구령에 맞추어 `앞으로 나란히`를 할 때면 왼쪽 팔이 자꾸 내려갔다. 내려간 팔을 들어 올려 보지만 자꾸만 내려가는 왼팔이 싫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잘 할 수 없어 마음의 상처가 컸다. 운동회 날에도 달리기를 잘 못하는 나는 우울했다. 달리기를 잘하는 친구들은 팔뚝에 빨강글씨로 1, 2, 3 등이 찍힌 팔을 보여주며 자랑할 때는 샘이 났다.
언젠가 달리기를 했는데 꼴찌는 물론이었고 꼴찌인 나와 내 바로 앞서간 친구사이의 차이는 멀었다. 그 이후는 창피해서 운동복만 입었지 모든 경기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런 나의 모습을 지켜보는 어머니의 마음이 많이 아프셨을 것이다.
어머니는 훗날 나의 자립을 걱정하여 익산에 있는 편물학원에 보내줬다. 3개월의 속성 과정을 마치고 편물로 번 돈으로 군산에 있는 중,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나마 약간의 자존감으로 하루하루를 지내오던 중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하게 됐다. 슬하에 세 딸을 두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어쩌다 간식을 들고 친정에 있는 경로당을 방문할 때도 어른들에게 “애가, 내 아픈 손가락이었는데 이제는 괜찮다.”며 나를 치켜 세워줬다. 딸들도 잘 가르쳐서 사위들도 잘 얻었다며 한참동안 당신의 마음속에 응어리진 한을 풀어 놓는다.
경로당 어른들도 보잘것없는 나를 따뜻하게 맞아 주며 손잡아 줬다. 이런 어머니의 마음을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퇴직 후 매달 말 일경 약간의 용돈을 드리려 가는 중에 갑자기 어머니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되어 클로즈업됐다. 나의 세 딸 중에 `나 같은 장애인 딸이 있었다면`하는 생각이 들자 눈물이 앞을 가려 도저히 운전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 집에 도착 할 무렵에야 눈물이 멎었다. 둘째가 편식하고 몸이 왜소한 것도 마음 아픈데 나의 장애로 인해 몇십 배 몇백 배 마음이 아프셨으리라.
한편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남편에게도 고맙다 한다. 세 딸이 세배할 때도 `엄마는 할머니의 아픈 손가락`이었으니 `이제 너희들이 엄마를 행복하게 해 줘야 한다.`며 나에 대한 걱정을 세 딸들에게 부탁하는 것 같다. 어머니의 마음은 무척 아프셨으리라.
내가 행복해할 때 `어머니의 아픈 손가락`은 치유 되리라 믿으며 오늘도 더 많이 행복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천원의 행복`과 `나는 어머니의 아픈 손가락`은 동일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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