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머리가 어때서
머리, 빠집니다. 털은 다 빠져요."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의사한테 이 말을 듣고 성질 급한 나는 머리카락이 뭉텅뭉텅 빠지는 꼴을 보기 전에 빡빡 밀어야겠다고 미장원에 갔다.
처음엔 머리가 대수냐, 술탄처럼 멋진 터번을 쓸까, 무슨 색이 좋을까 즐거운 상상도 했지만, 구체적인 암 환자의 모습을 혼자서 대면해야 하는 것에 적잖이 긴장되고 울컥하며 어떤 막연한 슬픔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 런. 데. 막상 이발기가 지나간 자리에 내 하얀 두피가 보였을 때 의외로 별거 아니군 싶었다. 간단했다.
침묵 속에 잠시 후 마무리까지 깔끔하게 되었을 때는 미용사도 나도 깜짝 놀랐다.
미용사가 조심스럽게,
"저어… 이런 말 하기 미안하지만… 진짜 이쁘네요."
"정말요?"
그랬다. 내 머리통이 어떻게 생겼는지 처음 보는데 신기하고 맘에 들었다.
손으로 쓸어 보니 감촉도 아주 좋다.
앞에서 뒤로 쓰다듬으면 약간 포근한 듯 귀엽게 부드럽고, 거꾸로 하면 까칠한 듯 상큼한 느낌이다.
이렇게 내 머리의 새로운 전성시대가 열렸다.
가족들은 물론이고 병문안 오는 사람마다에게 이거 만져보라고 들이대며 반드시 앞뒤 양방향을 손바닥으로 느껴 볼 것을 권하고 까불었다.
만져보면 다들 재미있어 했다.
가발은커녕 모자도 쓰지 않고 나다니는 내 모습에 처음엔 안타까워하던 이들도 웃음을 터뜨린다.
그 탐스럽던 머리가... 하며 마음 아파하면 나는 엄마뻘 되는 나이의 어른에게도 웃으며 호통을 쳐댔다.
내 머리가 어때서,
새로운 헤어스타일이라고, 이쁘다고 하라고,
적응하시라고, 이게 '나'라고...
그건 아마 내게 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오래전에 본 디즈니 애니메이션 <라푼젤>에서 여주인공 라푼젤은 황금빛 마법의 머리카락을 잘라낸 순간 자유의 몸이 된다. 나는 이 장면에서 엉엉 울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가장 소중한 아름다움과 생명력인 동시에 그녀에게 모든 재앙을 초래한 운명의 덫이었음을 보고 일 년쯤 후( 난 정말 느려터졌다), 내가 갖고 있는 그럴싸한 것들이 실은 나의 감옥이며 혼자서 부여잡고 있는 라푼젤의 머리채라는 걸 불현듯 깨달았었다.
늘상 그랬듯이 한 것도 없이 기분만 좋았지만, 때로 마음을 추슬려야 할 때, 복잡함을 조금이라도 단순하게 해야 할 때는 도움이 되었던 기억이 있다.
미장원에서 자를 수 없는, 매일 자라나는 내 안의 황금 머리채는 어떡해야 하나...